'여행'에 해당되는 글 90건

  1. 2007.10.31 보타닉 가든 : 도심속에 피어난 또 다른 자연공원
  2. 2007.10.31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새공원 - 주롱 버드 파크
  3. 2007.10.31 여행지로서의 싱가폴이란 어떤 나라인가?
  4. 2007.10.31 싱가포르의 기적을 이루어낸, 리콴유(李光曜)
  5. 2007.10.22 태국 치앙마이, 독특한 매력 풍기는 북방의 장미
  6. 2007.10.16 미국 방문 비자로 운전면허증 따기
  7. 2007.10.12 인도에서 네팔 가는 방법
  8. 2007.10.12 네팔 출입국 장소
  9. 2007.10.12 네팔의 볼거리
  10. 2007.10.12 네팔에서 한국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그곳 - 김치 하우스, 홍금보 아저씨네
2007. 10. 31. 12:15

보타닉 가든 : 도심속에 피어난 또 다른 자연공원

싱가포르 도시 안에만 머무르기가 지겨워 졌거나, 파란 잔디와 호수가 있는 넓고 한적한 공원에서 카다란 나무 밑 벤치에 앉아 마냥 여유를 부려 보고 싶다면 선택은 보타닉 가든.

이곳은 140여년의 역사를 가진 싱가포르 최대의 식물원이다. 이른 새벽부터 심야까지 문을 열기 때문에 싱가포르 현지인들에게도 피크닉이나 데이트 장소로 인기가 높다. 입장료도 없어 싱가포르인들에게는 아침 운동을 하거나 아이와 함께 점심 도시락을 먹으러 나오는 등 일상생활에서도 빠질 수 없는 훌륭한 녹지 공간이다. 산책길이 넓고 걷기 좋게 포장되어 있어 걷는 데는 힘들지 않다. 어퍼 링 로드 (Upper Ring Road) 도 꼭 걸어볼 것.

사마내 사만 (Samanea Saman) 나무에서 떨어지는 나뭇잎들이 마치 우리나라 단풍나무를 연상케 하며 분위기 잡고 걸어보기엔 그만인 길이다. 간간이 있는 벤치에 앉아 쉬어가기에도 그만이다.

열대림, 양치류, 장미, 난초류가 자라고 있는 정원 외에도 식물원 안에는 3개의 호수가 있다. 보타닉 가든 내부에 있는 난초공원(Orchid Garden)과 에어컨이 나오는 식물원 유일의 장소, 쿨 하우스 (Cool House) 도 들려볼 만 하다. 보타닉 가든 메인 입구 앞에 자리잡은 카페 겸 레스토랑 레자미 (Les Armis)는 그리 크지 않은 규모에 간단한 메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가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다. 07:30~11:00 까지 아침 메뉴가 따로 있는데, 세트 메뉴로 SGD10 정도. 세트 메뉴는 싱가포르 스타일의 로컬 세트와 베이컨과 감자요리가 주인 카페 세트 등으로 나뉘는데 맛도 괜찮고 가격대도 비싸지 않은 편이다. 보타닉 가든을 다 돌아보는데 2시간 정도 걸린다.

입장료 : 무료 / Open : 05:00~24:00
위치 : 오차드 MRT 역에서 오차드 블르바드 출구쪽으로 나가 택시나 버스로 5분
2007. 10. 31. 09:36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새공원 - 주롱 버드 파크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인상적인 조류 사육장인 주롱 새 공원은 관람객들에게 즐거움과 동시에 산교육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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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이곳은 600여종, 8000여 마리의 새들이 거대한 울타리 안에서 서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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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극장에서 펼쳐지는 플라밍고, 마코, 무소새와 앵무새들의 쇼는 재미있고 흥겨운 볼거리로 특히 어린이들에게 권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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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공원의 송버드 테라스ꡑ(Songbird Terrance)에서는 새의 노래를 들으면서 아침식사를 즐길 수 있다. ꡐ펭귄 퍼레이드ꡑ(Penguin Parade) 구역은 남극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5종류, 200여종의 펭귄의 안식처이며, 50여종의 바다 새 들도 함께 서식하고 있다. 또 다른 하이라이트는 색깔이 화려한 큰 부리 앵무새와 코뿔새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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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동남아시아 조류 사육장에는 동남아시아 의 적도부근 정글에서 온 100여종의 새들이 살고 있다. 이 새들의 적도 사육장은 정오에 부는 열대성 천둥폭풍우까지 사전 테스트를 거쳐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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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새롭게 전시되는 앵무새천국(Parrot Paradise)에는 100여종이 넘는 장난기 많은 앵무새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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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원을 여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파노레일(Panorail)」이라 불리는 현대적이고 냉방장치가 잘 된 모노레일을 타는 것이다. 이 모노레일은 공원 전체 코스를 구석구석 돌며 다양한 구역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그 다음으로는 도보 관광을 권하는데, 공원의 도보용 관람로와 지도를 이용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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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0. 31. 09:36

여행지로서의 싱가폴이란 어떤 나라인가?

1) 개 요

' 그린 & 크린 시티'로 불리우는 머라이언의 나라 싱가폴은 14세기 경에 수마트라 섬의 한 왕자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이상한 동물을 보고 사자로 오인하면서 '싱가푸라(사자의 도시)'라는 뜻으로 불리워 지다가 영국인들이 싱가포르로 발음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수 도 : 싱가포르(Singapore) / 도시국가

◈ 인 구 : 약 304만명(4,560/㎢)

◈ 기 후 : 고온다습의 열대성기후, 년평균 26,6℃

◈ 면 적 : 625.1㎢(서울시 605.4㎢)

◈ 종 교 : 불교.도교(53.3%), 회교(15.3%), 기독교(12.7%), 힌두교(3.7%)

◈ 민 족 : 중국계(77.5%), 말레이계(14.2%), 인도계(7.1%), 기타(1.2%)

◈ 언 어 : 영어(English), 중국어(Chinese), 말레이어(Malay), 타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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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 사

1832년에는 영국의 해협 식민지였으며, 1942년부터 1945년까지는 일본의 식민지였다. 이후 영국 식민지로 환원되었던 싱가폴은 1959년 영국 연방 내 자치 정부를 설립했으며, 1963년에는 말레이지아 연방에 속하게 되었다.

1965년에 이르러 비로소 독립 공화국을 설립하였으며, 117번째로 유엔에 가입하게 된다. 1964년 싱가폴의 옛이름인 테마섹 전설과 연관해 ꡐ머라이언ꡑ이 싱가폴의 상징으로 처음 착안 되어, 관광청 공식문장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머라이언은 젊은 나라인 싱가폴의 발전과 성장을 의미하는 상징으로 싱가폴 강 입구에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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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뒤에 있는 사자 머리가 머라이언이다)

3) 지 리

싱가폴은 본섬 외에 50여개의 조그마한 섬들로 이루어져 있고 총면적은 625㎦다.

북 위 1.09-1.29도, 동경 103.38 - 104.06도에 위치하며, 적도로부터 북쪽으로 1백37km 떨어져 있다. 이웃 인도네시아와는 동서를 잇는 유명한 해상 루트인 말라카 해협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말레이시아와는 조호 수로를 잇는 다리를 사이에 두고 가까이 인접해 있는 항만 도시 국가이다.

싱가폴 본섬의 서남부는 암석지대로 저습지가 많고 동부지역은 모래가 많아 해수욕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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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 화

싱가폴은 중국인, 말레이인, 인도인등 다양한 인종이 어울려 사는 나라이다. 싱가폴 국민들은 자국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고 중국, 인도, 말레이시아는 물론 멀리 포루투갈 국경까지 뻗어있는 다양한 문화적 뿌리를 향유하고 있다.

인 구는 2백 80만 명으로 공용어는 영어, 중국어, 타밀어, 말레이어이고, 종교는 불교, 이스람, 기독교, 힌두교이다. 천혜의 지리적 조건에 힘입어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정유시설을 보유하고 있으며, 고무, 주석, 코코넛, 석유, 목재, 쌀, 향료, 커피, 황마 등 각종산물의 거래시장으로 이 지역의 부를 창조하는 핵심지대로 각광받고 있다. 관광도 주요산업으로 성장하여, 하루 평균 1만 4천여명의 관광객이 싱가폴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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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 후

열 대의 기후로 연평균 섭씨 27-28도로 기온의 변화가 거의 없고 강우량에 따라 다소 변화를 느낄 뿐이다. 연중 상하의 날씨로 11월에서 익년 2월까지 동북 몬순 기후로 우기에 속한다. 우기라고는 하지만 하루에 한 두번 소나기(스콜)가 오고 나면, 곧 날씨가 갠다. 연중 기후는 맑고 고온 다습한 기후이지만 건물 안이나 공공시설은 에어컨 시설이 완벽해, 오히려 얇은 가디건 같은 겉옷이 필요하다.

6) 싱가폴 일반 정보

◈ 시차 : 한국보다 1시간 늦다.

◈ 통화 : 싱가폴 달러를 사용한다.

◈ 전압 : 대부분의 호텔이 220-240V, 50Hz를 사용한다. 플러그는 3핀 방식이다.

◈ 전화 : 통신산업이 발달하여 싼 요금에 세계 어느곳 과도 쉽게 통신이 가능하다.

        - 시내 통화 요금은 3분간에 10¢이다.

        - 국제 전화 요금은 다른 나라에 비해 저렴한 편이다.

◈ 한국통신 교환원 서비스 : 800-082-0820

◈ 우편 : 한국으로의 우편물 송부 - 60¢

◈ 축제

  - 1월 01일 - 신정

  - 1월 17일 - 타이푸삼 (힌두교 축제)

  - 3월 03일 - 하리라야 푸하사 (이슬람교 행사)

  - 4월 14일 - Good Friday (이슬람교 행사)

  - 5월 01일 - 노동절

  - 8월 09일 - 싱가폴 독립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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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0. 31. 08:53

싱가포르의 기적을 이루어낸, 리콴유(李光曜)

싱가폴을 여행하기에 앞서 싱가폴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1. 서 문

흔히들 싱가포르하면 세가지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부유하고 깨끗한 도시,깨끗한 공무원,무서울 정도로 엄격하다는벌금, 태형(곤장) 제도...

지금이야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나라중 하나로 유명하지만  지금으로부터 40여년전...그러니까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사실상 쫓겨나다시피하여 '원하지않는 독립'을 할 당시만 하더라도 싱가포르는 빈곤과 무질서가 판치는 '곧 완전히 망할것 같은' 나라였다.

부존자원은 커녕 가장 기본적인 마실 물조차도 부족해서 이웃나라인 말레이시아로부터 사다 마셔야했고, 연 평균 인구증가율은 당시 세계최고수준이라고 할수 있는 연 4%대에 달한데다가 '공식적인' 실업율만 12%가 넘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작은 도시국가 답지않게 여러 민족들이 뒤섞여 살고있어 인종폭동까지 발생할 정도로 갈등과 반목이 아주 심했었고, 공산주의자들은 혼란을 틈타 정권전복을 노리던 불안한터였다.

그러나, 싱가포르인들은 낙심하지않고, 눈물겨운 노력끝에 오늘날과 같은 번영된 도시국가를 이루어내었고,그 과정에서는 일찌기 보기드문 탁월한 정치가인 리콴유(李光曜:이광요) 의 역할이 결코 적지않았다. 리콴유...그는 과연 누구이고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가?

2. 출생과 성장

리콴유(李光曜)는 1923년 9월 16일 싱가포르의 어느 화교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일족은 중국에서 소수민족 취급을 받는 하카(客家)족 이었으며( 참고로, 중국의 지도자이자 개혁,개방을 선도하였던 덩 샤오핑[鄧小平]도이 하카(客家)족 출신이다.)

리콴유는 그 화교이민자의 4대째 후손이었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만 하더라도 그의 집안은 부유했었으나 세계 경제대공황으로 인하여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된 뒤부터는

평범한 중산층 정도로 몰락했다. 하지만, 공부에 대한 열의가 높았던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영어계 교육기관인 텔록쿠나우 초등학교와 래플스 중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당시 싱가포르 최고의 대학이었던 래플스 대학에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하게 된다.

그런데, 그가 래플스 대학에 재학중이던 1941년 12월,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당시 영국의 아시지역 식민지 거점이었던 싱가포르에도 침략의 손길을 뻗치게 된다. 영국을 포함한 연합군은 예상밖의 고전을 겪다가 결국 일본군에게 싱가포르를 넘겨주게 되었고, 일본군은 싱가포르 주민 5만여명--대부분 중국계 주민들을 대상--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게 되는데, 중국계였던 리콴유는 아주 아슬아슬하게 학살현장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일본군의 싱가포르 점령이 장기화된터라 리콴유도 본의아니게 일본군 선전기관지를 발행하는 부서에서 연합군 측의 선전방송 내용을 감청하는 잡일을 하며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고, 암시장에서 브로커로 일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서 중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자신의 최대 경쟁상대였던'콰 걱추[Kwa Geok Choo]'라는 아가씨와 친해지게 된다. (나중에 그녀와 결혼)

3. 영국 유학 - 새로운 세상에 눈 뜨다.

1945년 8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고 쫓겨났던 영국군이 다시 싱가포르에 들어오게 되었으나 공산주의자의 난동등으로 인하여 싱가포르는 전쟁이 일어나기 이전과 같은 평화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리콴유는 전쟁 전까지 다니던 래플스 대학에 복학하지 않고 그간 모아둔 돈을 털어서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게된다. 처음에는 LSE(런던정경대학), 나중에는 케임브리지 대학 법대(트리니티 칼리지) 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점차 민족문제,인종차별문제에도 눈을 뜨게 되었다.( 원래 그는 영국에 유학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철저한 영국문화 신봉자였고

심지어는 어렸을때부터 집안에서 중국어대신 영어만 사용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유학생활중 마난 일부 영국인들에게 인종차별을 경험하면서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많은 경험과 공부를 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다소간의 관심을 보이곤 했고, 나중에 그가 싱가포르 정치계에 입문했을때 유학시절의 겸험을 살려 일하게 된다. 또한 유학시절 싱가포르 출신의 유학생들인 고켕쉬[Goh Keng Swee], 용 풍하우[Yong Pung How],케니 번[Kenny Bun],토 친츠에[Toh Chin Chye]등과 사귀며, 정치를 주제로 토론을 벌이기도 하고 싱가포르의 장래를 걱정하면서도 미래에 대한 꿈을 키워갔다.(이들은 나중에 싱가포르의 리콴유 총리내각에서 중요한 직책을 담당하게 된다.)

나중에는 영국에서 합류한 애인 '콰 걱추'와 함께 공부하며 케임브리지 법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영국 변호사 시험에도 합격한뒤 ( 당시 싱가포르는 영국의 직할식민지이었기에 영국에서 취득한 변호사 자격은싱가포르에서도 거의 그대로 통용되었다.)

1950년 8월, 당당하게 고향 싱가포르로 돌아오고 그 다음달에 정식으로 결혼도 했다.('콰 걱추'여사와는 이미 영국유학시절이었던 1947년 12월에 비밀리에 결혼한 상태였다.)

4. 변호사에서 정치인으로...

헌데, 그가 영국유학을 떠날 당시처럼 여전히 싱가포르는 혼란과 궁핍이 공존하는 사회였고, 그는 변호사 일을 하면서도 현실사회를 바꿔볼 요량으로 차분히 준비를 하다가 결국 영국 유학시절 알게된 동지들과 일부 싱가포르 토착세력, 그리고 말레이 반도,인도출신의 이주민들을 주축으로1954년 11월'인민행동당(People's Action Party: PAP) '를 창당하게 되었다.

당시 싱가포르 정계는 영국인들에게 아부하는 일부 중국계 식민지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재야정치계에선 공산주의자들--주로 중국계,인도계--이득시글 거렸다. 리콴유는 부패하고 고루한 기득권 세력과 손잡을 생각이 없었기에 일시적이나마 재야 공산주의자와 손잡게 된다. (그래서인지 정당이름부터가 좌익적인 색채가 느껴지는(?) '인민행동당[PAP]'이었고, 이때문에 한때 리콴유도 '색깔론'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심지어는 영국 식민정부 공안,정보기관의 요시찰 대상 리스트에 포함되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는 변호사로 활동하고, 정치게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불합리한 영국 식민지배체제에 대해 직,간접적인 비판과 저항을 (평화적인 수단으로) 벌였고, 또한 여러 노동조합의 법률고문으로 일하면서 노동관계사건등을 주로 수임하였던터라 그는 중국계 중하류계층의 밑바닥 민심을 얻을수 있었다.

마침, 당시 여당이었던 노동당과 인민전선은 잇단 정치적 실책으로 점차 민심을 잃어가고 있던 시기였던터라 리콴유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1955년 4월에는 렌델 개정 헌법하의 싱가포르 자치령 입법평의회 선거에서 그를 포함한 세 명의 인민행동당 소속 후보가 당선되었고, 드디어 1959년 5월 그가 당수로 있던 인민행동당이 싱가포르 총선거에서 승리를 거두게되면서(총 51석중 43석 획득) 리콴유도 싱가포르 자치령의 총리가 된다.

5. 35세의 젊은 총리

그가 싱가포르 자치령의 총리자리에 취임하던 당시 그는 35세의 젊은 나이였다. 영국식민정부의 관료로 일한 경험이 있는 '고켕쉬'등 몇몇 정치적 동지들과는 달리 리콴유 그 자신은 그때까지도 별다른 행정경험이 없었다. 허나, 일본군 점령시절과 영국유학시절 겪은 체험, 특히 영국의 앞선 정치,사회제도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차근차근 싱가포르 전체를 개혁하는 정책을 펼치게 된다.

그가 집권한뒤 가장 먼저 펼친 정책은 정부재정의 건전화였다. 고위공무원들의 봉급을 자진삭감해가면서 재정적자를 흑자로 반전시키려고 노력했으며, 당시 무주택자가 대부분을 차지하였던 현실을 감안하여주택개발청(HDB) 를 설립, 일종의 영구임대아파트를 대량으로 건설하여 서민층의 생활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

또한, 싱가포르의 고질적인 병폐였던 부정부패를 근절하기 이한 강력한 정책을지속적으로 펴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공직비리조사국( Corrupt Practices Investigation Bureau: CPIB) '의 설치,운영이었다.

그 어느 정치인들 못지않게 의욕적으로 정책을 추진하던 리콴유를 막아선 것들은 바로 다름아닌 공산주의자들 이었는데, 그들은 상투적인 전술이었던 폭력혁명은 물론이거니와 선거에서의 승리를 통한 합법적 정권탈취,공산화도 획책하고 있었다.

리콴유는 처음엔 그들을 묵인,방조해 주는듯 했으나 나중에 공산주의와 정면으로 맞서 싸울만한 힘이 생기게 되자 그들과 전면전을 선포하게 된다.인민행동당(PAP) 내에 있던 공산주의자들은 집단으로 탈당하여 '바리산 사회주의 연합'이란 정당을 세우고 리콴유에게 조직적으로 저항하려고 했다.

허나, 리콴유 집권후 그가 보여준 국민들을 위한 노력들이 진실했던 덕분에 대다수의 싱가포르인들은 과격무식한 공산주의자들을 자연스레 외면하게 되고 결국 공산주의자들은 1960년대말 이후론 싱가포르에서 거의 사라지게 된다.

서울시만한 좁은 땅에, 변변한 자원은 커녕 마실 물조차 부족한 싱가포르가 독자적으로 생존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생각한 리콴유는 국민들을 설득하여곧 영국에서 독립할 예정인 이웃나라 말라야(말레이 반도) 와의 합병을 추진하게 된다.

공산주의자들의 방해책동등 많은 우여곡절끝에 1963년 싱가포르가 영국으로부터완전히 독립하자마자 사라와크,사바(보르네오 섬 북부지방) 와 함께 말레이시아 연방을 결성하게 되었다.

6. 말레이시아 연방으로부터의 원하지 않는 독립

허나,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이 어느정도나마 사라지자 이번엔 중국계-말레이계간의 인종갈등문제가 이슈화 되었다. 싱가포르만 따지고 본다면 중국계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지만 말레이시아 연방 전체를 놓고 볼때는 말레이계가 다수를 차지했다. 정치적,군사적 실권도 말레이계가 차지하고 있었던 반면, 경제권은 부유한중국계(화교) 가 차지하고 있었기에 두 인종간의 갈등이 극심했다.

게다가, 민족감정을 부추겨 유권자들의 표를 얻으려는 말레이 반도 본토의극단적인 정치세력의 책동때문에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 주(州) 사이에는 감정싸움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심지어는 아예 대놓고 싱가포르를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축출해야 한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말레이 이들도 점차 늘어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결국 1964년 7월 21일, 예언자 모하메드의 생일(이슬람교의 경축일중 하나) 을 맞이하여 싱가포르내의 이슬람계 말레이인들이 인종폭동을 일으켰고, 1964년 9월에도 또 한차례 폭동을 일으켜서 각각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참상이 빚어졌다.

리콴유는 폭동을 진정시키기위해 직접 거리로 나서서 마이크를 잡고 선무방송에 나서기도하고, 말레이시아 연방정부의 말레이 민족주의 강경파들과도 대화를 시도해보는등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싱가포르를 존속시키고자 갖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 말레이시아 연방에 편입한지 2년밖에 안된 1965년 8월 9일,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떠밀려나듯 탈퇴를 하게 된다, 그야말로 '원하지않은 독립'이었던 것이다.

7. 나라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투쟁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독립하던 당시, 나라의 상황은 아주 암담할 정도였다. 높은 실업율과 인구증가율,경기침체 등등...게다가 1967년부터 싱가포르 주둔 영국군이 철수기 시작하면서 국가안보,경제적인 면에서 타격을 입게 되었다. (당시 싱가포르주둔 영국군이 뿌려놓는 돈이 싱가포르 전체 GDP의 1/4정도나 되었음)

이런 국가존망의 위기속에서도 리콴유는 강렬하고도 지속적인 노력을 거듭하게 된다.

외국투자가들에 대해 폐쇄적이었던 당시의 대다수 제3세계 국가들과는 달리 싱가포르는 외국인 기업을 적극적으로 유치하여 일자리를 창출하였다. 아무런 부존자원과 자본이 없고, 인구만 넘쳐나던 싱가포르의 현실하에서는 해외투자유치가 최선의 방책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리콴유는 한때 노동사건 전문변호사였기에 처음에는 노동자에게 무척 우호적이었지만 차츰 기업가들에게도 유리한 정책을 펴게 되며, 무분별한 노사분규를 강력히 억제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연간 임금인상율을 2% 내외로 억제하는 식으로...대신 서민생활 안정을 위해 영구임대주택 보급확대,적극적인 물가안정정책을 펴는등 자본가,노동자 양쪽 모두를 위하는 정책을 폈다.

이는 결과적으로 싱가포르의 사회적 안정과 더불어 해외자본의 유치확대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파업이 사라지고,임금인상율은 그다지 높지 않은데다가 노동력의 질적인 수준도 높아졌으니 자연스레 투자가들의 관심을 끌수밖에 없었다.

또한, 대다수의 제3세계 국가들의 잘못된 국가통치사례들에서 교훈을 얻어 부정부패 척결에 한층 더 역점을 두었으며, 경제개발과정에서 소흘히 하기 쉬운 환경보호 사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다른 대다수 나라와 달리 싱가포르는 공업화를 이루면서 오히려 환경이 더 깨끗해졌고, 오염이 줄어들었다.심지어는 싱가포르의 대표적인 중공업지대인 주롱 공업단지 한복판에 세계적인 희귀조류들을 모아놓은 [주롱 새 공원]을 만들어 놓았을 정도로...당연히 그 수많은 새들은 탈없이 서식하고 있다. 또한 싱가포르는 수도물을 안심하고 그대로 마실수 있는 전 세계의몇 안되는 국가이기도 하다. - 세계보건기구[WHO] 인증 )

싱가포르 항만공사(Port Of Singapore Authority: PSA) 를 설립하여 세계 일류 수준의 컨테이너 항구를 건설하기도 하였고,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의 여파로 인하여 경제형편이썩 좋지않은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훗날을 대비하여 새로운 국제공항인창이 국제공항(Changi International Airport) 을 건설하는 사업에막대한 비용을 과감하게 투자하기도 하였다.(1981년 7월 1일 개항)

장기적인 안목으로 과감한 사업을 벌인 그의 노력에 힘입어 오늘날과 같은 '물류중심지 싱가포르','동-서양간 항공교통의 최고요충지 싱가포르'로 화려하게 변신하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중앙은행격인 싱가포르 통화청( Monetary Authority of Singapore: MAS) 의 조직,기능을 확대개편하고 세계 유명금융기관을 적극적으로 유치하여 싱가포르를 동남아시아의 금융중심지로 변모하게 만들었다.

8. 청렴한 독재자?

이젠 세계적으로도 유명해진 강력한 벌금,태형제도 시행을 통해 법질서를 바로 잡아서 무질서,범죄를 현저하게 줄인것도 빼놓을수없는 그의 주요성과이다. 잘못을 저지르면 고위층에게도 아주 가차없이 처벌을 가했다.( 출장비를 남겨서 개인적인 용도로 유용한 어느 싱가포르 판사는 그 유용액수가 우리나라 돈으로 10만원 정도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표를 내야만했다.또한, 미화 20만 달러 가량의 뇌물을 받은 혐의를 받게된 싱가포르의 국가개발부 장관이자 리콴유의 오랜 측근이었던 테 체앙[Teh Cheang Wan]도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그 대신에 유능한 인재의 공직으로의 진출을 유도하고, 공무원들이 부정부패에 대한 유혹에 쉽게 넘어가지 않게하기위해 파격적인 수준으로 공무원 급여를 인상해주었고, 적극적으로 성과급 제도를 도입하였다.

'청렴의 상징'으로 불리우는 그조차도 한번은 부정부패 의혹을 산적이 있었는데,(고급 콘도미니엄 구입과정에서 분양금의 일정액을 할인받았다는 이유로...) 그는 주저없이 자신에게도 조사를 하라며 아주 적극적이고도 떳떳한 태도를 보였다.

물론 그 부패의혹은 사실무근으로 판명되었다. 고급 콘도미니엄 분양과정에서의 분양금 할인은 싱가포르에선 사실상 관행으로 정착된 일이었기에 그에겐 별다른 잘못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허나, 그는 어쨌든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친것에 대해 사과하며, 할인받은 '합법적인' 금액의 전부를 자선단체에 기부해버렸다.

또한, 무책임하고 근거없는 비판남발을 막기위해 언론에 대한 규제를 펴고, 자신에 대해 근거없는 의혹,비난을 가하는 언론에 대해 거액의 명예훼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는 식으로 적극적인 응징을 가하기도 했지만, 반면에 재판에 승소하게되면 받은 금액 전부를 주저없이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면모도 보여주었다.

싱가포르 건국 초창기의 극심한 혼란상에 염증을 느낀 그는 집회,시위에 대해 엄격한 규제를 가했지만, 한편으로는 국민들과 여러경로로 직접 대화를 나누면서 국민들의 불만,건의사항을 정책결정과정에 적극 반영하기도 하였다.

경호원도 동반하지 않은채 싱가포르 항공[Singapore Air Line]사옥 안의 직원용 수영장에 찾아가서는 말단 직원들과 격의없는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깨끗한 거리를 조성하기위해 덥디더운 날씨에도 손수 빗자루를 들고 나서서 반나절 가량이나 길거리 청소에 앞장서기도 했다.

또한, 싱가포르 인구에서 소수를 차지하는 말레이계,인도계의 권익 향상과 복지증진에도 노력을 하는등, 싱가포르내 각 민족간의 화목과 단합을 위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고, 그 결과 예전에 비해 인종갈등문제가 많이 개선되었다.

이런 식으로 국민을 위한 진심어린 정책을 편 덕분에 리콴유는 30여년간이나 심각한 저항없이 장기집권을 할수 있었다. 비록 그동안 일부로부터 너무 독선적이다라느니 강압적인 정책이라느니 하는 비판을 받긴 했지만 일부에서는 그를 독재자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그를 굳이 독재자로 불러야 한다면 '청렴한 독재자'라고 표현하는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9. 그의 인간적인 면모들

어느 기자가 싱가포르에 갔다가 겪은 실화.국립극장에서 열리는 공연을 보러갔다가 다섯번째 줄에 앉은 노부부를 보았는데, 알고보니 그들은 당시 현직 총리였던 리콴유의 부모였다. 아들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총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들 노부부는 1등석도 아닌 일반석에 앉아서는 평범한 시민들처럼 공연을 보고 있었고, 그들 노부부는 기자의 질문에 "내 아들이 총리인거랑 극장 1등석이랑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오히려 반문했다고 한다.

어떠한 특권도 거부하는 그런 모습에 기자는 경탄을 할수밖에 없었다.

또한, 리콴유의 아버지는 아들이 총리자리에 오른 뒤에도 70세가 넘도록 작은 시계수리점을 경영하며 평범하게 살았다.( 리콴유의 일가 친척이나 인척중에서 '별다른 경력이나 능력도 없는' 이가고위직에 오르거나 한 사례는 전무하다.)

리콴유는 외국 방문이 잦은 편인데 그때마다 전용비행기나 전세기가 아닌 일반 정기항공편을 이용했다. 상당수 제3세계 국가의 지도자들이 가난한 나라살림에도 불구하고 값 비싼 전용비행기를 구입하여 해외순방시의 이용하는것과는 사못 대조적이다.

중국계임에도 불구하고 어릴적부터 영어학교에만 다니고, 영어만 사용하던 그는

싱가포르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중국계 유권자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 뒤늦게나마 중국어(만다린어,호키엔 방언)를 배우게되었는데 각고의 노력끝에 호키엔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게된건 그의 나이 마흔살이 되던 무렵이었다.

그는 시대의 조류에 적응하기위해 70세가 될 무렵에 뒤늦게나마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하여 많은 어려움끝에 80세가 넘은 지금은 컴퓨터로 채팅하고 인터넷 웹 서핑,이-메일 송수신등을 아주 능숙하게 해낼만큼 실력이 향상되었다고 한다.

10. 오늘날의 싱가포르

1965년 8월,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 연방으로부터 독립할 당시 싱가포르는 가난하고,혼란스러운 전형적인 제3세계 국가에 불과했다. 당시 싱가포르의 1인당 GDP는 약 500달러 정도 허나, 1990년 리콴유가 총리자리에서 물러날 시점엔 1인당 GDP가 12,200달러 정도가 되었고, 1999년에는 그 두 배가량인 약 22,000달러가 되었다.현재 (물가수준을 감안한) 싱가포르의 1인당 실질 GDP는 세계 4위에 달할 정도로 약 40여년전과는 완전히 변했다.

국가별 국가경쟁력 순위를 매기면 매년 최상위권에 드는 나라이며, 부패지수가 가장 낮은 나라중 하나가 되었다.작은 나라이면서, 미국에 경제,안보분야등 많은 것을 의존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 법을 어기고 행패를 부린 미국 소년 마이클 페이(Michael Fay) 에게가차없이 태형(곤장) 을 집행하는등 결코 부끄럽지 않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주변에는 인구가 2,200여만명에 달하는 말레이시아와 2억여명의 거대한 인구를 자랑하는 인도네시아도 있지만 싱가포르는 전혀 위축되지 않고 동남아시아의 '작은 거인'으로 행세하고 있다.

11. 리콴유의 근황

30여년간 싱가포르의 총리를 역임하였던 리콴유. 그도 결국 1990년, 고 촉동에게 총리자리를 물려주고, 정치일선에서 한발짝 물러났다. 그러나, 총리직에서 사임한지 얼마 지나지않아 그는 후임자들과 동료들의 요청을 받아들여선임장관(Senior Minister) 이란 직책을 맡게된다.

선임장관이란 총리와 부총리의 중간정도의 위치에서 중요사안에 대해 총리와 내각에 조언을 해주는 자리이니 그는 총리를 그만둔 후에도 여전히 막후에서 적지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2004년 8월 12일, 리콴유의 뒤를 이어 14년간 싱가포르의 총리로재임하였던 고촉동이 물러나 선임장관(Senior Minister) 이 되고,새로운 총리로 리콴유의 첫째 아들인 리센룽(李顯龍) 이 취임하였다.( 리센룽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과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교육을 받았으며,그동안 싱가포르 공군 준장,싱가포르 재무장관,부총리 요직을 거치면서오랜 경험을 쌓았다.)

허나, 여전히 리콴유는 고문장관(minister mentor)으로 자리를 옮겼기에 앞으로도 간접적으로나마 싱가포르 내각에 영향력을 미치리라 예상된다.또한, 현재 그는 싱가포르가 보유중인 막대한 외화자산을 해외투자등을 통해관리,운용하는 싱가포르 투자청(GIC) 의 이사회 의장을 겸하고 있다.

12. 맺음말

리콴유...그가 싱가포르 총리에 취임하던 당시의 상황은 '암울함' 그 자체였지만 현재 싱가포르는 '아테네 이후 가장 놀라운 도시국가'로 불리우고 있다. 헌데, 여전히 그에 대한 평가는 둘로 나뉘어져 있다. 그를 칭찬하는 사람들은 그를 근래 보기드문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20세기 최고의 정치인'으로까지 평가하기도 한다.

반면에 강압적인 통치를 펴서 국민들의 개성을 말살한것 아니냐는 비난의 목소리도 있다. 실제로 2001년 홍콩 최고의 명문대학인 '중문(中文) 대학교'에서 리콴유에게 명예법학박사학위를 수여하려 하자 그 대학 재학생 1천여명이 '독재자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해서는 안된다'라며 반대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어쨌든, 리콴유는 20세기 아시아인들중에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인물중 하나임에는 틀림없을듯 싶다. 최악의 여건속에서도 꿋꿋하게 노력하여 오늘날과 같은 성과를 이루었다는것...또한 개인적인 치부보다는 국가전체의 이익,국민의 이익을 위해서 노력한 정치인은 전 세계적으로도 그다지 흔하지 않으니 말이다.

참고문헌 > [리콴유 자서전(원제:The Singapore Story)] - 리콴유 (문학사상사.1999)

[From Third World TO FIRST - THE SINGAPORE STORY :1965-2000]- Lee Kuan Yew (Harper Collins.2000)

2007. 10. 22. 21:32

태국 치앙마이, 독특한 매력 풍기는 북방의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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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크란 축제

치앙마이는 과거 독립 왕국이었던 란나의 수도로 태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다. 현재 치앙마이에 남아 있는 고대 사원과 오랜 역사를 지닌 유적들이 옛 영화를 대변하고 있다. 치앙마이의 풍부한 문화유산과 뛰어난 감각의 예술품 그리고 고산족들의 흥미로운 생활방식은 여행자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송크란 축제가 시작된 곳

= 방콕에서 700㎞ 떨어진 곳에 자리한 치앙마이는 태국 북부 중심에 위치한 도시다. 지금은 태국 제2의 도시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예부터 독특한 역사와 문화 그리고 뛰어난 경관을 지니고 있어 '북방의 장미'라 칭송받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치앙마이 직항편이 없어 방콕을 경유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지난달부터 대한항공이 직항편을 운항하면서 우리와 한층 가까워졌다.

무 엇보다도 치앙마이는 많은 이들에게 송크란 축제 발원지로 잘 알려져 있다. 송크란 축제는 태국에서 가장 유명한 행사 중 하나로 새해를 맞이해 몸과 마음을 씻어내고 복을 나눈다는 의미로 시작된 물축제다. 축제 기간이 되면 물총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모두 거리로 나와 서로 물세례를 해 주며 신나는 시간을 보낸다. 거리는 온통 물바다가 되고, 사람들의 옷은 마를 틈이 없다.

매년 4월에 열리는데, 축제가 워낙 유명해져 이 기간에 맞춰 태국 여행을 계획하는 외국인들이 해마다 늘고 있다. 송크란 축제는 태국 전역에서 열리지만, 가장 화려하고 비중 있게 행사가 치러지는 곳이 바로 치앙마이다.

최 근 치앙마이는 태국 북부를 둘러보려는 트레킹족의 관문으로도 인기를 모으고 있다. 치앙마이 고산지대에 카렌족 등 13세기 말부터 거주하기 시작한 소수민족들이 지금도 그들만의 생활방식을 고수하며 살아가고 있어 독특한 볼거리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트레킹과 고산족들의 생활모습은 좀더 특별한 여행을 원하는 이들의 욕구를 만족시켜 줄 것이다.

◆금빛 찬란한 사원

= 태국, 미얀마, 라오스의 국경 지대에 둘러싸여 있는 메콩강 주변을 가리켜 흔히 '골든트라이앵글'이라고 부른다. 골든트라이앵글에 속한 지역은 비옥한 토지와 다양한 문화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치앙마이가 바로 태국 골든트라이앵글에 속해 있다. 치앙마이는 이러한 지리적 여건 덕택에 다채로운 문화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도시 곳곳에서 스리랑카, 미얀마, 몬 문화 등이 융합된 독특한 사원들을 만나볼 수 있다.

치앙마이에서 만날 수 있는 수많은 사원 중 하이라이트를 꼽자면 왓 프라탓 도이수텝을 들 수 있다. 왓 프라탓 도이수텝은 시내에서 16㎞ 정도 떨어진 도이수텝산(해발 1080m) 정상에 우뚝 서 있다. 화려한 금빛 탑과 조각상이 볼거리다. 유적지에 관심이 없는 여행자에게도 역시 훌륭한 관광지가 된다. 이 곳에서 내려다보이는 치앙마이 시내 풍경이 무척 근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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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 프라탓 도이수텝

왓 프라탓 도이수텝은 옛날 진신사리를 운반하던 코끼리가 산을 오르다 멈춰 선 곳에 지어진 사원으로, 부처의 진신사리가 안치된 이 곳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지금도 끊이질 않는다.

△항공=대한항공에서 인천~치앙마이 구간 직항편을 주 4회 운항한다. 비행시간은 약 5시간30분 소요된다.

△ 상품정보=대한여행사는 치앙마이를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상품을 내놓았다. '치앙마이 트레킹 5일' 상품은 매주 금ㆍ토요일 출발한다. '치앙마이ㆍ치앙라이 코끼리 트레킹 6일' 상품은 매주 월ㆍ화요일 출발. 골퍼를 위한 '치앙마이 골프+온천욕 5~6일' 상품도 있다. 5일 일정은 매주 금ㆍ토요일에, 6일 일정은 매주 월ㆍ화요일에 출발한다. 관광상품은 44만9000원부터, 골프상품은 59만9000원부터. (02)722-8188

[글 = 윤희상 여행작가]

2007. 10. 16. 15:34

미국 방문 비자로 운전면허증 따기

방문비자(B1/B2)로 캘리포니아에서 운전면허나 I.D Card를 취득할 수가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법에 의하면 캘리포니아에서 체류를 하거나 취업을 하기 위해서 도착한 사람은 10일 내에 캘리포니아 운전면허증을 취득하라고 법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법을 잘 알지 못하고 국제운전면허증을 가지고 운전을 하다가 경찰에게 잡히면 무면허 운전자로 소지하고 있는 자동차 까지 견인해 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국제면허증과 한국 운전면허증을 가지고 운전을 하다가 경찰에게 잡혔을 경우 때로는 묵인을 해 주는 경우도 있지만 무면허로 간주를 하여도 항의할 곳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한 국제면허증으로는 운전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본인 명의로 차를 사서 국제 면허증으로 운전하는 경우는 캘리포니아 운전면허증을 취득할 때까지 자동차를 압류당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꼭 국제면허증으로 운전을 해야 할 경우에는 반드시 한국 운전면허증을 함께 소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특별히 명심하여야 할 것은 현재는 방문비자(B1/B2)를 가지고 운전면허증을 취득할 경우 입국 시 공항에서 발행한 I-94 상에 기록된 기간(최고 6개월)까지만 운전면허증이 발급된다는 것을 알고 면허증을 취득하여야 할 것인지를 결정지어야 할 것입니다.


미국에 방문비자로 입국하여 계속해서 미국에서 체류를 할 계획이 있는 경우는 먼저 운전면허나 I.D Card를 발급 받습니다.
그리고 입국 후 3개월이 지나면 학생비자(F-1)로 신분을 변경하게 되면 6개월짜리 운전면허증을 1-5년짜리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 운전면허 응시 요령


미국에서 운전면허 시험을 응시 할 때 초보자의 경우는 어차피 운전학원에서 정식으로 운전 교육을 받으면 되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한국에서 운전을 10-30년간 해온 40세 이상 되는 사람입니다.


한국에서 운전을 오래한사람일수록 미국식 운전에 익숙하지가 않기 때문에 실기 시험에서 합격하기가 어렵다고 하겠습니다. 방문 비자로 와서 운전면허를 취득하는 방법을 자세히 알고 싶은 경우는 (213)272-7498로 문의를 하시면 상세히 알려드립니다.


또 한 운전을 잘하는 사람이 운전학원에서 운전 교습을 받지 않고 직접 시험에 합격을 하고 싶은 경우는 "미국생활 필수지침서" (한인 타운 각 서점에 있음) 의 운전 실기시험 치는 요령을 숙지하시고 그 방법대로만 하면 실기 시험 치르기가 한결 쉬울 것입니다.


운전면허를 DMV에서 신청을 할 때 I.D(Identification Card) Card를 함께 신청을 하면 운전면허가 없을 경우 신분증으로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운전면허 신청 시 DMV에 지불하는 수수료는 26달러이며, 접수 시 시력 검사를 하니 시력이 나쁜 사람은 필히 안경이나 콘택트렌즈를 준비해 가는 것이 좋습니다.(I.D. Card 신청비는 21달러임)
실기 시험을 치러 갈 때 운전 학원을 통하지 않고 개인이 직접 자동차를 가지고 시험을 치러 갈 때는 반드시 운전면허 소지자를 태우고 같이 가야하며, 이때반드시 자동차 보험증과 자동차 등록증을 가지고 가야합니다.


운전학원을 통하여 운전을 배울 경우 소요되는 경비는 운전 교습은 하루에 2시간씩 연습을 하며 교습 비는 시간당 30-35 달러입니다. (운전 경력과 나이 및 성별에 따라 교육 시간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운전 실기시험 비용은 시간당 30-35 달러 이며 1-2시간 떨어진 곳에서 시험을 치를 경우는 250-300 달러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명심하여야 항 것은 250-300 달러를 지불하고 시골로 가서 시험을 치는 것 까지는 좋은데 시골에 간다고 해서 100% 합격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많은 경비를 들여서 시골에서 시험을 쳐서 떨어 졌을 때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이 점을 꼼꼼히 생각한 후에 결정을 하는 것이 후회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 론적으로 운전 시험에 합격을 하기 위해서는 운전 시험 규정을 완전히 숙지 한 후에 실기 시험을 쳐야만 합격이 가능하고 또한 운전면허 취득 후에 교통경찰에게 잡힐 확률도 적지만 급하다고 해서 적당히 시골에 가서 합격을 할 경우 경찰에게 법규위반으로 잡힐 확률이 많다는 것을 명심하셔야합니다.


참고로 경찰로 부터 티켓을 발부 받게 되면 몇 백 불의 벌금과 함께 8시간의 교통위자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이러한 것을 소홀히 생각하지 마시고 미국에서 제대로 생활하시기를 원하시면 제대로 미국식 운전을 배워서 실기 시험을 치는 것이 좋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운전면허 취득 및 갱신에 관한 구체적인 문의는 (213)272-7498로 하시면 됩니다.

2007. 10. 12. 10:12

인도에서 네팔 가는 방법

네팔과 인디아 사이를 오가는 전통적인 육로는 아직도 많이 이용된다. 두 나라 사이를 오가는 교통수단으로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은 버스이다.

주요 국경 검문소는 수나울리-바이라와(Sunauli-Bhairawa), 비르간지-락사울바자르(Birganj-Raxaul Bazaar), 카카르비따-실링구리(Kakarbhitta-Siliguri) 등 세 곳이 있다. 수나울리 국경 검문소는 인도의 바라나시(Varanasi)로부터, 비르간지는 캘커타에서 그리고 카카르비따는 다르질링(Darjeeling)에서 각각 네팔로 건너올 때 가장 편리한 곳들이다.

드물게 네팔 극서지역에 있는 마헨드레나가르-반바싸(Mahendrenagar-Banbassa) 검문소를 통해 네팔에 들어오는 여행자들도 있는데 이곳은 바라나시를 들르지 않고 델리(Dehli)에서 직접 네팔로 건너갈 때 편리한 방법이다.

네팔과 티벳을 오갈 때는 코다리(Kodari)를 거치는데 그룹으로 편성된 경우는 건널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북쪽으로 건너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몬순 기간 동안에는 주기적으로 산사태가 일어나 길을 이용할 수 없으므로 이 루트를 통해 이동할 계획이 있다면 대안도 미리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고락뿌르를 통해 소나울리로 가기

델리 -->고락뿌르 -->소나울리 --> 포카라나 카트만두로
델리나 자이뿌르쪽에 계시는 분들은 델리에서 고락뿌르로 기차를
델리에서 밤기차를 타고 그다음날 오후쯤에야 고락뿌르에 도착

이 기차가 럭나우를 거쳐서 가는 것이기 때문에 힘드시다면 럭나우에서 쉬시고 버스로 고락뿌르까지 가는방법...

고락뿌르에 도착하시면 다시 국경마을 소나울리로 가는 버스를 찾으셔야해요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겠는데 유리가 여행할 때만 해도 고락뿌르에서 소나울리가는 버스를 찾는게 힘들었어요.왜냐구요? 고락뿌르 사람들이 영어를 못해서 말이죠^^;;

고락뿌르에 도착하면 근 근방에 호텔이름이 붙은 4~5층짜리 건물이 있습니다.
그 건물 근처에 넓은 대로가 보이는데 "네팔" 또는 "소나울리" 라고 물어보면 버스정류장을 찾는데 도움이 될꺼에요

버스는 한시간에 한 대씩 .소나울리까지 걸리는 시간은 저도 정확하게 생각이 안나는데 4~5시간 정도
소나울리에 도착하시면 먼저 사람들에게 "이미그레이션 오피스"를 물어보세요 그러면 금방 가르쳐주거든요.인도측 이미그레이션 오피스인데요 거기 가셔서 인도를 빠져나간다는 도장을 받으시구요(여권을 보여주고 도장받아야합니다)

그리고나서 나오면 국경같지 않은 국경(?)이 보입니다.뚜벅뚜벅 넘어 네팔측 이미그레이션 오피스를 가셔야해요. 거기서 네팔비자를 신청하는 서류를 쓰시고 여권과 돈을 지불하면 비자를 받으실수 있다.


요기서 잠깐~!!

싱글 비자: 단수비자 2개월 체류 가능 30$

멀티플 비자: 60일 이내 한 번 더 재 방문 55$ (30$ +25$)

두 번 재방문 70 $ (30 + 40)

비자는 소나울리나 카트만두에 입국해서 받을수도 있고 한국에서도 받아서 갈수있습니다.

주한 네팔 영사관 (전화번호: :02-555-9040)
소나울리에서 숙소는 유명한 네팔 게스트 하우스(더블에 50루피 화장실 포함)로 가세요.
포카라나 카트만두로 이동하실 분들은 국경넘느라 피곤했을텐데 하룻밤 주무시고 아침에 이동하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여름철 우기에 네팔에 도착하셨다면 밤차는 위험하니깐 될 수 있으면 피하도록


(2) 레나닥/리쉬케쉬 지역에서 네팔 넘어가기

1.레/라닥을 주축으로 한 북인도 여행을 마치고 그쪽에서 네팔로 들어가시고자 한다면 델리로 나오셔서 올드델리 버스 스탠드에서 인도쪽 국경 반바사까지 버스로 이동하셔야해요~
반바사 가는 버스를 갈아타는 지점은 할드와니. 리쉬케쉬에서 할드와니 가는 버스 있답니다

2.반바사 버스 스탠드에서 사이클 릭샤로 긴 다리도 건너고 한 10여분 떨어진 곳에 허름한 인도쪽 이미그레이션 오피스에서 출국 도장을 받으세요

3.다시 릭샤로 5분정도 네팔국경 마헨드레나가르로 이동해서 이미그레이션 오피스에서 네팔비자를 받은뒤 조금 떨어져 있는 마헨드레나가르 버스 스탠드에서 네팔간지까지 버스로 이동한뒤 네팔 어디건 가시면 됩니다.(포카라,카트만두 등)

그러나 이코스는 정말 힘든 코스입니다. 버스 여행 말이죠.
그리고 나오실때는 여러곳에 국경이 있으니 상황대로 나오시면 되겠습니다.

(3) 다르질링지역에서 네팔 넘어가기

:다르질링에서 산을 타고 직접 네팔로 넘어 가는 것은 불법으로 나중 발각 됐을 시 매우 난처한 곤경에 빠질 수 있습니다-_-;;
보통, 다르질링에서 합승짚차로 실리구리까지 내려온 뒤, 여기서 다시 네팔의 국경도시인 "카카르비타"까지 간 다음,다시 "카트만두"행 버스를 타고 장장 14시간 정도 걸려 가는 방법이 있는데, 그 시간 선택을 잘 하셔야 합니다.(카트만두에 밤에 도착하지 않기 위해 카카르비타에서 밤차를 탈 것을 권함)

델리 근방을 돌아보고 "바라나시"에서 버스로 다이렉트로(약 8시간 소요) 소나울리까지 간 뒤, 네팔의 룸비니,포카라,카트만두를 돌아보고 다이렉트로 네팔 동쪽의 국경 카카르비타로 가서 바로 국경을 넘고 실리구리를 거쳐 다르질링으로 가시면 되요.

이 코스는, 일단 카트만두에서 카카르비타까지의 여정이 견딜만하고 네팔을 가로로 관통하는 의의도 있고,만일 오후 5시 쯤 출발하는 카카르비타행 버스를 카트만두 버스스탠드에서 타시면 다이렉트로 다음날 해 지기 전에 다르질링에 도착할 수 있는 장점이 있거든요.

다르질링을 거쳐 다시 실리구리로 내려온 뒤 켈커타로 가시면 됩니다.
다시 델리로 가는 건 다이렉트로 가는 특별열차를 타시면 시간 절약되겠네요~!!


* 최근에 네팔 동쪽 "카카르비타"를 통해 왕래하는 것이 별로 안좋은 소식이 들려오므로 가급적 안전한 "소나울리"를 통해 왕래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네요^^굳이 일정때문에 어쩔수 없이 통과한다면 날이 환한 대낮에 통과하는 것이 좋습니다.(특히 여자분은 가지마세요..유리가 말려요~)

2007. 10. 12. 10:09

네팔 출입국 장소

카트만두의 트리부반국제공항
카카르비타(자파 - 네팔동쪽, 인도 국경)
비르간지(파사 - 네팔 중앙지역, 인도 국경)
코다리(신두팔촉 - 북쪽, 티벳 국경)
벨라히야(바에아화 - 루판데히, 인도 국경지역의 서쪽)
잠무나하(네팔간지 - 반케, 인도 국경지역의 중앙 서쪽)
모하나(당가디 - 카일아일, 인도 국경지역의 서쪽끝지역)
가다차우키(마헨드라나가르 - 칸차안푸르, 인도 국경지역의 서쪽끝지역)

2007. 10. 12. 10:08

네팔의 볼거리

페와호수 산책, 배 타기
lake side 구경, 쇼핑
David's fall(Cave) - David's fall 맞은 편으로 동굴로 들어가면 David's fall로 통한다.
비싸다.(250Rs)
티벳 난민촌 방문- 다람살라를 갔었다면 굳이 갈 필요없음
Hungry Eye Restaurant :민속춤, 공연(오후7시-8:45까지)을 보며 식사를 한다.
공연을 보기 위해 따로 돈을 낼 필요는 없지만 음식값이 비싸다.
공연이 끝나고 현지인 들과 춤을 출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진다.


※ 슈퍼마켓이 많지만 가게마다 가격차가 나므로 싼 곳을 이용한다.
인도처럼 심하게 가격흥정을 하지 않는다.
비가 갑자기 오기 때문에 우산은 필수이다.
포카라 내에서 버스나 교통편이 좋지 않기 때문에 자전거, 오토바이 대여, 인원을 맞춘다면 택시도 좋음(택시는 바가지가 심하다.)

2007. 10. 12. 10:07

네팔에서 한국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그곳 - 김치 하우스, 홍금보 아저씨네

김치 하우스

맛있는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
주인 '치주'가 한국말을 잘해서 트레킹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값이 비싸다.(100-300Rs) ACAP Office 못 가서 있다.

홍금보 아저씨네

한국에서 보다 더 맛있는 김치를 먹을 수 있는 곳
빵집과 고급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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