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2. 8. 23:12

가평 운악산, 겨울산의 차가운 유혹

가평 운악산

겨울산은 솔직하다.
포근하고 두툼한 하얀 눈이불을 덮기 위한 준비일까. 겨울 칼바람에 나뭇잎이 하나 둘 떨어지면 꼭꼭 숨겨왔던 산의 거친 속살이 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다. 경기도 가평과 포천의 한가운데 우뚝 선 운악산(雲岳山ㆍ935.5m). 바위가 많아 악산, 짙은 고동의 나무들 사이로 희고 검은 바위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겨울의 운악이다.
운악산은 개성의 송악산, 파주의 감악산, 가평의 화악산, 서울의 관악산과 함께 '경기 5악'으로 불리고 그중에서도 최고의 명산이자 악산으로 손꼽힌다.
화사한 진달래의 봄빛, 짙푸른 여름의 녹음, 불타는 가을의 단풍으로 거칠고 험한 모습을 가려왔던 운악산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게 겨울이다.
산 입구에서 바라보는 모습만으로도 하늘을 찌를 듯, 구름을 뚫을 듯 솟아 있는 기암괴석들이 모여 금강산의 축소판 같은 장관을 그려낸다.

 

가평 운악산

따뜻한 물이 들어 있는 보온병을 챙기고 바람막이, 아이젠, 랜턴까지 준비하니 배낭은 무겁지만 마음만은 든든해진다.
'운악산 만경대는 금강산을 노래하고, 현등사 범종소리 솔바람에 날리는데, 백년소 무진폭포에 푸른 안개 오르네.'
운악산 입구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시구를 읽으며 운악의 품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눈 아래로 골프장이 드넓게 펼쳐져 있는 지능선 위를 오르기 시작하니 두껍게 입은 옷 때문인지 무거운 배낭 탓인지 벌써부터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인적 드문 호젓한 등산로, 사각사각 발 밑에 밟히는 낙엽 소리를 들으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간다. 수북하게 쌓인 낙엽과 부드러운 흙 위를 걸으니 푹신한 감촉에 기분이 상쾌해진다. 나뭇잎 하나 없는 스산한 나뭇가지들 사이로 차가운 겨울바람이 옷 속으로 스며든다. 몇 분쯤 올랐을까. 눈썹바위가 산을 오르는 등산객들을 지긋하게 내려다본다. 암벽 중앙에 처마를 이룬 듯 매달려 있는 모습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눈썹바위를 지나니 돌길이 나온다. 작고 아기자기한 돌길이 아니다.
'집채만한 바위'라 부를 만큼 거대한 암석들이 길을 만들고 있다. 줄을 잡고, 쇠로 된 받침대를 밟으며 쉼없이 오르니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가평 운악산 

30여 분을 그렇게 산을 올라 무명봉에 도착하니 거짓말처럼 운악의 장관이 눈앞에 확 펼쳐진다.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솟은 운악산 정상과 깊게 파인 협곡, 아래가 보이지도 않을 만큼 아찔한 단애와 암봉들이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려낸다.
다 시 미끄러운 바위를 오르며 산행을 계속한다. 온몸이 땀에 젖지만 흘린 땀만큼 정신은 맑아지고 마음은 차분해진다. 한 발 한 발 옮길수록 정상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온다. 운악산 입구에서 시 한수 읊으며 오른 지 2시간. '운악산'이라고 커다랗게 써 있는 정상에 다다랐다.
'와~' 눈앞을 가리는 것이 없다. 광주산맥의 여러 맥 가운데 한북 정맥에 속한 운악산을 중심으로 가평의 명지산, 연인산, 화악산이 끝없이 뻗어 있다. 지평선 끝까지 산들이 켜켜이 겹쳐 흘러가고 매서운 겨울 칼바람에 미처 녹지 않은 눈발이 흐릿하게 휘날린다. 도심 속 복잡하게 뒤엉켰던 머리와 마음이 씻기는 듯 고요해진다.
"겨울 산은 정상에 오르려고만 하면 안 돼. 벌거벗은 산처럼 오르는 사람도 마음을 비우고 한 발 한 발 산을 느껴야지. 그래야지 조금씩 산을 닮아갈 수 있어."
정상에서 만난 나이 지긋한 등반객이 던진 한마디.
말 없는 겨울 운악은 산을 찾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르침을 전해주는 듯하다. 솔직하게 자신을 보여주고 세상 번뇌를 품을 수 있는 가슴 넓은 겨울산을 닮고 싶다.
[가평 = 조효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