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2. 9. 11:23

속옷, 또 하나의 바디랭귀지

속옷, 또 하나의 바디랭귀지

세계의 경제수도이자 패션도시 뉴욕 맨해튼의 34번가와 브로드웨이가 만나는 거리. 지나가는 관광객들이 원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고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카메라는 세계적 여성 속옷 브랜드인 ‘빅토리아즈 시크리트’의 쇼윈도에 초점이 맞춰졌다.


몇 년 전 중세풍 실내장식에 요염한 속옷 차림으로 유혹하듯이 포즈를 취한 모델의 커다란 사진이 걸려 화제가 됐던 이곳엔 지금 분홍색 팬티와 브라를 걸친 모델이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 걸렸다. 볼 테면 마음껏 보라는 듯 하고 있는 표정이다.
서울 명동의 패션 란제리 전문점인 ‘에블린’ 매장. 진주 목걸이를 한 금발 미녀가 레이스가 달린 검정색 팬티 브래지어에 가터벨트까지 걸치고 엔틱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손님들을 유혹하고 있다. 가족과 함께 나온 신사들은 애써 외면하고 지나가지만 젊은이들은 사진까지 찍으면서 분위기를 즐긴다.
인근의 여성 속옷 전문점인 ‘섹시쿠키’ 매장. 팬티와 브래지어만 걸친 여성 모델이 누운 자세로 지나가는 손님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조금은 더 젊은 층을 상대하는 여성속옷 전문점인 ‘예스’나 ‘마루’ 등의 매장에는 원색에 가까운 팬티 브래지어가 가득하고 커플팬티 차림의 마네킹이 손님을 맞는다.
이들은 더 이상 ‘빤스가게’가 아니다. 새로운 패션의 리더이고 사랑의 메신저이다. 진취적인 여성들의 자부심을 자극하며 새로운 구매력을 만들어내는 시장의 창조자이다.


새로운 패션은 거리를 바꾸고 있다.
굳이 TV나 인터넷에서 패리스 힐튼이나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보지 않더라도 이제 미국 주요 도시에서는 란제리 끝자락을 적당히 보여주며(?) 활보하는 여성들을 찾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 정도다.

 

속옷, 또 하나의 바디랭귀지

섹시가수 채연이 란제리룩을 입고 나와 화제가 됐던 한국에서도 속옷은 패션으로 당당히 자리 잡아가고 있다. 서울 롯데호텔 등 유명 호텔이나 명동거리에서도 브이넥 사이로 란제리 일부를 노출시킨 여성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힙합바지나 골반바지의 허리춤으로 컬러풀한 팬티 자락을 드러내놓고 다니는 것은 이제 유행처럼 되었다.
거리로 나온 속옷은 이제 ‘속옷’이 아니다. ‘옷’ 그 자체이자 패션이다. 더 이상 은밀한 아름다움에 머물지 않고 남에게 자신의 당당함을 보여주는 수단이 되었다.


전문가들은 여름에만 즐기던 노출 패션이 철을 가리지 않고 인기를 끌면서 속옷이 패션의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고 한다. 깔끔한 셔츠 안의 브래지어를 그대로 비춰주는 시스루룩이나 과감하게 가슴 라인을 파 브래지어 컵이 살짝 드러나도록 하는 패션 등이 유행하며 속옷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빅토리아즈 시크리트 뉴욕 브로드웨이 매장의 메릴린 모클씨는 “최근 여성들은 속옷을 과감하게 밖으로 드러내놓고 입는 경우도 많다”며 “의류제조업체들도 아예 겉옷으로 입을 수 있는 속옷 패션을 내놓고 있다”고 말했다. 모클씨는 또 “파티에서나 분위기 있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반짝이가 박힌 브래지어 등을 드러내놓고 입는 여성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에블린 명동점의 강소영씨는 “겉옷처럼 화려하게 입을 수 있는 란제리들을 내놓고 있는데 나오는 대로 다 팔려나간다”고 설명했다.
좋은사람들 ‘보디가드’ 부문의 신선주 디자인실장은 “속옷은 이제 기존 디자인을 탈피하고 다양한 컬러와 패턴으로 겉옷보다 더 세심한 디테일이 가미되어 ‘보여주는 패션의 일부’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 남성과 함께 고르는 란제리 ■
속옷이 ‘옷’으로 변하면서 이를 대하는 남성들의 시각도 바뀌고 있다. 지난 11월 하순 서울 명동의 패션거리. 에블린 명동점엔 당당한 표정의 직장여성들은 물론이고 남자친구의 손을 이끌고 오는 여대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인근 ‘바디팝’이나 ‘예스’  ‘섹시쿠키’ 등 여성 속옷 매장에도 남편이나 남자친구와 함께 들어서는 사람들이 절반에 육박할 정도였다.

속옷, 또 하나의 바디랭귀지

부인과 함께 예스 명동점을 찾은 이수영(32·가명)씨는 “요즘 여성 속옷들은 색상이나 디자인이 화려하게 바뀌어 보기만 해도 즐겁다”며 웃었다.
서울 홍익대 앞의 아날드바시니 홍대점을 찾은 대학생 김희숙(가명)씨는 남자 친구와 함께 가게에 들어섰다. 김 씨는 흰 바탕에 핑크색 하트무늬가 찍힌 팬티브라 세트를 들고 어떠냐고 물었다. 남자친구는 옆에 있는 검정색 레이스가 달린 게 더 섹시해 보인다고 말했다. 김 씨는 남자친구의 선택에 따랐다. 가게를 나서며 김 씨가 한 눈을 찡끗하자 남자친구는 멋쩍은 듯 미소로 답했다.
박경아 아날드바시니 홍대점 점장은 “요즘 젊은이들은 아주 당당하게 남자친구와 함께 들어와 어느 것이 예쁜지 상의를 하면서 고른다. 남자가 혼자 들어와 선물로 사가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박 점장은 또 “이들은 ‘감추고 싶은 속옷’이 아니라 ‘당연히 입는 옷’을 사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박순자 바디팝 명동점 매니저는 “커플손님이 50% 정도는 되

는 것 같다”며 “다른 손님들이 있어도 쭈뼛거리지 않고 당당하게 들어와서 상의하며 고르고 있다”고 말했다.
업체들도 이 같은 추세를 반영해 아예 컬러풀한 커플속옷을 속속 내놓고 있다. 소위 1925세대(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의 젊은 층)를 타깃으로 하는 ‘바디팝’이나 ‘예스’까지도 커플속옷을 내놓고 있다. 커플 티, 커플 캡에서 커플 란제리 시대로 발전한 셈이다.


여기엔 변하고 있는 젊은 남성들의 패션 감각도 작용하고 있다. 신선주 보디가드 디자인실장은 “남성들이 최근엔 겉옷의 스타일에 따라 속옷을 선택할 만큼 신경을 쓰고 있다”며 “보다 섬세해지고 보다 다양해진 남성들의 기호를 반영해 체형보정 기능 팬티나, (봉제선이 없는) 헴라인 팬티, 남녀가 같이 입는 속옷 등 다양한 제품을 내놓고 있다”고 설명했다.


■ 심플한 것은 싫다 ■
패션 란제리는 ‘보여주는 옷’으로 자리를 잡아가면서 점점 화려해지고 있다. 지난 20일 오후 이영자(가명)씨는 단골로 가는 에블린 명동점에 들어서며 “좀 야시시한 게 나왔나”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점원이 짙은 갈색의 팬티 브래지어 세트를 추천하자 이 씨는 한번 입어보겠다며 탈의실로 들어섰다. 잠시 후 만족스런 미소를 띠고 나온 이 씨는 즉시 카드를 꺼내 결제를 했다.

속옷, 또 하나의 바디랭귀지

비슷한 시각 바디팝 명동점에선 두 명의 중국 아가씨가 핑크색 팬티 브래지어 세트를 고른 뒤 같은 색 슈미즈 두 개를 들고 어느 것이 잘 어울리나 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었다. 나뭇잎 무늬보다 점박이 무늬가 좋다고 하자 이들은 밝은 얼굴로 싸달라고 했다.


이 점포의 박순자 매니저는 “요즘은 심플한 색은 거의 안 나간다”며 “섹시한 것과 로맨틱한 컨셉트의 제품이나 포인트가 강한 것이나 펀(fun)한 것, 수영복처럼 화려한 것이 잘 나간다”고 설명했다. 에블린 명동점의 강소영씨는 “핑크색이나 골드칼라의 화려한 제품이 요즘 인기를 끌고 있다”고 밝혔다. 아날드바시니 홍대점의 박경아 점장도 “요즘엔 화려한 색상이나 검정색 세트가 많이 나가고 레이스가 달린 것도 잘 나가는 편이다”고 귀띔했다.


기존 란제리업체들도 예외는 아니다. 신영와코루나 남영L&F 등도 최근 빨간색이나 짙은 보라색의 꽃무늬 팬티 브래지어 세트를 내놓는 등 화려한 색을 대거 채택했다. 과거 스킨칼라가 주종을 이뤘던 여성 속옷 시장이 확 변하고 있는 셈이다.
빅토리아즈 시크리트 맨해튼 브로드웨이 매장의 리사 데븐포트 점원은 “최근 여성들의 속옷은 점점 야해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면서 “레이스를 이용하거나 섹시하게 보이는 디자인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전했다.


속 옷이 보여주는 패션으로 자리를 잡아가면서 벨트라인 위로 드러나는 팬티밴드와 어깨 위로 드러나는 브래지어 끈도 유행을 타고 있다. 최근 업체들은 팬티밴드의 색상을 원색에 가까운 것이나 무지개처럼 여러 색이 들어간 것 등으로 컬러풀하게 꾸미고 있다. 최근엔 브래지어 끈도 원색이나 검정 레이스로 된 것, 반짝이는 금속이나 큐빅 진주 소재로 만든 것까지 내놓고 있다.


■ 품위 vs 변화 ■
미국에서 란제리 패션 시대를 주도하고 있는 빅토리아즈 시크리트는 그다지 싼 브랜드는 아니다. 그렇지만 자신을 당당하게 표현하려는 여성들과 이들에게 점수를 따려는 남성 고객들 덕에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다. 이 회사 브로드웨이 매장의 리사 데븐포트는 “안정적 수입이 있는 20~30대 여성층이 주요 고객인데 이들은 비싼 옷도 상관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속옷, 또 하나의 바디랭귀지

비너스나 비비안 등 전통적 브랜드가 주도하던 한국 란제리 시장에서 패션 개념을 확산시키는데 힘이 된 것은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젊은 여성들이었지만 최근에는 청년층 전반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이랜드 마케팅팀의 김정현 대리는 “처음 패션 란제리 브랜드를 런칭할 때만해도 호기심을 가진 층과 ‘이래도 되느냐’며 거부감을 보이던 층이 뒤섞인 데다 외환위기 직후라 경제도 좋지 않아 고전했다”면서 “이후 경제가 안정되고 일정한 소득을 지닌 직장 여성이나 전문직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시장이 확산되는 추세”라고 했다.


자신을 당당하게 표현하려는 이들은 조금 비싸더라도 화려한 속옷을 선호한다는 것. 이들은 특히 팬티나 브래지어 등 전통적 속옷은 물론이고 가터벨트나 슈미즈 등도 함께 갖추는 추세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경제적 능력을 갖춘 2535세대에 이어 1925세대도 속옷 패션 변화에 동참하고 있다. 속옷을 ‘엔터테인’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신세대의 가세로 ‘보여주는 옷’의 성격은 점점 더 강해지는 추세다. 수능시험을 앞두고 도끼 그림이 새겨진 팬티의 인기가 치솟는가하면 달마시안풍 속옷이 불티나게 팔려 나가는 것도 무관하지 않다.


패션 속옷이 인기를 끌면서 다수의 업체들이 참여해 가격 하락과 함께 새로운 시장 형성에 기여하고 있다. 1만원도 안 되는 팬티브라 세트까지 등장하면서 고등학생까지 패션 속옷 대열이 동참하는 추세다.
업 체들의 움직임도 점점 빨라져 이미 여러 개의 속옷 브랜드를 내놓은 이랜드나 좋은사람들은 물론이고 ‘엠코르셋’이나 ‘예신퍼슨스’ 등도 강하게 시장을 확대하고 있다. 전통적 브랜드인 신영와코루는 핑크비너스로 20대를 공략하고 있다.
여기에 일본의 섹시 란제리 브랜드 에메필을 비롯한 외국 브랜드까지 가세해 한국의 속옷 패션시장은 점점 더 달아오를 조짐을 보이고 있다.


【 빅토리아즈 시크리트 거대 유통기업의 젖줄 】

속옷, 또 하나의 바디랭귀지

수많은 미국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남성들에게까지 사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유혹하고 있는 빅토리아즈 시크리트. 독립된 회사가 아니라 미국 전역에 2900개가 넘는 대형점포를 보유하고 있는 유통거인 리미티드 브랜즈라는 회사의 여러 브랜드 중 하나이자 사업부다.


그런데 10만이 넘는 직원을 두고 있고 연간 매출이 110억 달러에 달하며 미국 MBA과정의 사례연구에도 수시로 등장하는 이 회사가 실상은 속옷으로 먹고 산다면 쉽사리 납득을 할 수 있을까.
지난 1963년 오하이오주의 컬럼버스라는 도시에서 설립된 리미티드는 잇단 점포 신설과 M&A, 구조조정을 반복하면서 급성장했다.
80년에는 익스프레스라는 이름의 점포를 열었고, 82년에 레인브라이언트를 세웠다. 레인브라이언트는 2001년 매각했다.
82 년에는 빅토리아즈 시크리트를 100만 달러에 사들여 여성 속옷 장사를 시작했다. 이후 87년에 익스프레스의 남성 브랜드를 매각하고 이듬해 여성 브랜드인 애버크롬비를 인수하고 리미티드투(Too)를 출범하는 등 이 회사는 M&A와 구조조정을 반복하며 사세를 키워 나갔다.
특히 2002년 리미티드와 인티미트를 합병해 리미티드 브랜즈로 사명을 변경하는 등 조직을 재정비한 뒤 올해 캐나다의 유명 의류 브랜드인 라센자를 인수하며 다시 확장에 나섰다.


현재 이 회사는 속옷 브랜드인 빅토리아즈 시크리트를 비롯해 란제리 브랜드인 라센자, 미용제품 브랜드인 배스&바디웍스와 C.O. bigelow, 양초회사인 화이트 반 캔들 컴퍼니, 고급 패션 브랜드인 헨리 벤델 등을 보유하고 있다.
재 미있는 것은 단기간에 수많은 M&A를 해 오면서 회사의 주력이 확 바뀌었다는 점. 리미티드 브랜즈는 지난 2006년 총 106억7100만 달러 매출에 11억7600만 달러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그런데 모기업 격인 리미티드 스토어즈가 올린 매출은 4억9300만 달러에 불과했다.


대조적으로 빅토리아즈 시크리트는 지난 해 51억 3900만 달러 매출에 9억 5800만 달러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매출의 절반 가까운 금액과 영업이익의 81%를 빅토리아즈 시크리트가 올린 것이다. 게다가 리미티드 스토어즈의 매출은 지난 해 10% 줄어든 반면에 빅토리아즈 시크리트의 매출은 16%나 성장했다.
미국에서 손꼽히는 의류 유통업체를 먹여 살리는 게 여성 속옷부문인 것이다. 패션 란제리 사업이 더 이상 ‘빤스가게’가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정진건 기자·위정환 뉴욕특파원]